대학시절 내가 참 좋아했던 여자 후배가 있었다.
나보다 두 학번 아래의 후배였는데, 동아리 활동도 같이 하고 여러모로 같이 쏘다닐 기회가 많아서 후배 중에 그 누구보다 친하게 지냈었었다. 졸업 후에도 가끔 만나 같이 영화도 보고 차도 마시고 유일하게 만났던 후배였다.
그런데 그 후배가 8년전 쯤에 정말 갑자기 백혈병으로 세상을 등졌다.
나는 아직도 그 후배를 생각하면 가슴이 따뜻해지고 입가에 웃음이 돈다.
그 애를 생각한다고 해서 무섭거나 오싹해지거나 또는 슬프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내 옆에서 나를 지켜볼 것만 같이 따뜻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오늘 문득 옛날 회사 다닐때 백업 받아두었던 하드를 정리하다 보니깐, 그 애가 세상을 뜨고 나서 그 애가 활동했던 어느 피씨통신 동아리에 걔가 써놨던 글을 내가 저장해 둔 것을 발견했다.
너무도 그 애가 그리워서 그 애가 써놨던 글을 내가 찾아서 저장해 뒀던가보다.
그 글 중에 나와의 에피소드가 들어 있는 글이 두어개 있었는데, 그걸 보니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
98/07/19 04:05:53이 글에서 선배 라는 작자가 바로 나네.
내가 좋아하는 [스팅]
오늘 분위기 좋은 바도 [스팅]
무심코 본 보그지에 실린 [스팅]
광분 비슷한 흥분을 하는 나를 보며 선배 왈
"책 훔치는 건 도둑이 아니야"
그리곤 내 가방안에
너덜너덜한 그 보그 잡지를 넣어준다.
거절하지 않고 베시베실 웃기만 하는 나.
재미있게 봐야 겠다.......
실은 찔리지만 다음에 가면 갖다 놓을 거다.
이젠 단골이 되기로 결심 했으므로.
드디어 나에게도 부천에 아지트가 생긴 셈.
98/07/19 03:37:34예술의 전당에서 했던 루브르박물관 조각전을 함께 봤었는데, 아마 그 날 밤의 일화이지 싶다.. 두 글 모두 다.
옛 선배를 만나 꽃병을 회상하다.
일체의 부정적인 것들 잊어버리고 아름다운 시절만을 이야기하다.
속된 감정 비웃으며 우리 순수했던 시절 잔잔히 이야기하다.
리버럴리스트들에 대한 반감과 동정이 엇갈리고
어느쪽도 아닌 날개잃은 우리들의 겨드랑이를 확인하며
우리는 그렇게 그리스 사모트라스의 승리의 여신의 날개를 감상했다.
그 날개가 [타이타닉] 선체 앞에 달려있었다는 일화를 싱겁게 들으며.
나는 생각한다.
지금 우리는 왜 날개를 말하지 않는가.
지금 우리는 왜 날개없는 이 시대를 말하지 않는가.
과거의 날개를 말하며 우리는 다만 한잔의 위안을 얻는다.
우리는 직감한다.
이제 우리의 과거는
한잔의 위안을 넘어서지 못하고
하루의 불면을 넘어서지 못하여
오로지 다음날 아침 멋적은 신트림으로 끝나 버리고 말것을.
문득 이 글을 보니 너무 오래 되었는데도 그 날의 일상들이 환하게 떠오른다.
이상하게 바로 어제 있었던 일은 잘 기억도 안 나는데, 이렇게 오래 된 일들은 왜 이리 어제같이 기억이 환할까?
나도 이제 늙었나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