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 1일 월요일

지난 밀린 얘기는 다 건너 뛰고, - 사진 정리해 놨으니 언젠간 쓰겠지 - 오늘은 오늘 있었던 이야기.

9월의 첫째날이 월요일인데, 2학기 급식 당번에 맨 첫번째 타자로 걸려서 12시 10분쯤에 비를 추적추적 맞으며 몽치네 학교로 향했다. 몽치의 엄마 노릇을 8여년간 하다 보니, 나도 공원길을 지나가며, 비맞으러 나온 지렁이나 철조망에 치렁치렁 얽혀 핀 나팔꽃 등을 그냥 쉽게 지나치진 못하고 관찰하며 걸어가는 사람이 되어간다.
오늘도 비가 와서 그런지 지렁이들이 보도에 잔뜩 나와서 꾸물거리고 있었고, 파란색과 보라색이 섞인 엄청 청명한 나팔꽃들이 화알짝 피어 있었다. 그런데 집에서 출발하기 바로 전에 예의 그 와카타케 나나미 작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에서 "사라져가는 희망" 이라는 편을 읽고 갔던 나로서는 - 그 내용인즉슨 집 앞에 잔뜩 핀 나팔꽃으로부터 살려달라는 꿈속의 공격을 당해, 점점 기를 빼앗겨 스스로 자살하는 어느 젊은이의 이야기 - 그 나팔꽃이 어찌나 섬뜩하게 느껴지던지... 때마침 그 때 나팔꽃이 잔뜩 피어 있을게 모람 -_-; 하면서 연상작용으로 일어나는 공포에 떨며 학교로 향했다.

급식당번이니 청소당번은 언제나 하기 싫은 일들 중 1순위이지만, 그래도 모처럼 집에서 빠져 나와 아들 학교도 구경하고 점심급식 먹는 모습도 구경하는 재미가 나쁘지만은 않다.
오늘도 좀 일찍 도착해서 복도에서 서성이며 지켜보니, 몽치가 웬일인지 일찌감치 밥을 해 치우고선 얌전히 책을 읽고 있더라. 이제 정신 좀 많이 차렸나보다 우리 아들.

애들이 정신없이 떠들며 하교한 다음 서둘러 교실 정리를 하는데, 선생님께서 반갑게 인사를 해 주시며 표독의 안부를 물어주시고, 또 "몽치가 그림일기도 잘 그리고~~" 하면서 칭찬을 해 주신다.
근데 나는 왜 평소에 선생님이라는 직업군들을 무지막지하게 존경하지도 않으면서 - 심지어 싫어라하는 - 왜 또 선생님 앞에만 서면 딱 말문이 막히며 긴장이 팍 되는지..
이것 저것 물어보고도 싶었는데, 왠지 말문이 안 트이고 또 마구 긴장이 되어서 땀을 뚝뚝 흘리며 열나 청소만 하고 돌아 왔다. 핫핫핫.. 이 바보.
남편과 아이들에게 행패 부리는 그 용기는 다 어디 갔는지 -_-;;

청소를 하며 뒤에 진열되어 있는 아이들의 방학숙제를 보니 또 기가 팍 죽더라.
모두들 어찌나 잘들 해 왔는지...
물론 그것이 다 엄마들의 지령에 의한 숙제인 것 같았지만, 그래도 정성에 감복할 만한 것들이 몇 건 있었다.
박몽치에게 은근슬쩍, "야 니네 친구들 정말로 숙제 잘 했다... 너도 담 방학 땐 저렇게 좀 하지?" 라고 했더니, 뭐 듣는 둥 마는 둥 관심도 없다.
그래, 니가 아직 세상에서 튀어야 살아 남는다는 것을 느끼지도 못할 것이고, 또 그렇게 사는게 꼭 잘 사는 거는 아니더라. 그냥 니 지조대로 쭉 그렇게 살아라 하면서, 맘을 편히 비워버렸다.
그러면서도 계속 청소하면서 다른 애들 숙제 해 온 걸 슬슬 뒤적거리며 보았다.

돌아오는 길엔 늘 그렇듯이 학교 앞 편의점에서 약간의 음료수와 간식거리를 사서 마시고 재잘거리며 공원길을 걸어왔다.
급식당번하러 갈 때는 죽을 정도로 싫지만, 요렇게 또 아들내미랑 단 둘이 하교하는 기분은 참 좋다.
오면서 몽치가 우산 너머로 내게 묻는다.
"엄마, 이거 산성비예요?
"응, 요즘은 공기가 안 좋아서 대부분 산성비일거야."
"엄마, 왜 하느님이 눈물을 흘리는 거에요? 비는 하느님이 눈물 흘리는거라면서요"
"그건 사실이 아냐. 더운 공기가 하늘로 올라가 구름이 되어가지구 설라므네, 그게 비가 되어서 다시 내려오는 거지.... -라고 떠들다가 갑자기 이거..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들며 - 아냐아냐 하느님이 눈물 흘리는 것도 맞긴 맞다. 캬캬캬"
"엄마, 천둥이 왜 치는 지 아세요?"
"멀라?"
"그건 말이예요.. 옥황상제가 그 마누라랑 싸우다가 화가 나서 장농을 집어 던져서 그런거래요"
"킥킥킥... 그거 외할머니가 말씀해 주신거지?"
"네, 그런데 번개는 왜 치는 거예요?"
"음.. -_-+ 옥황상제 마누래가 광선총을 쏘나보지"
"캭캭캭.."

공원길을 걸어오다 보니, 아까 그 나팔꽃들이 다들 입을 쏙 오므리고 있다.
나는 아는 체를 하며
"야, 아까 이 나팔꽃들이 활짝 펴 있었는데, 지금은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그런지 다 입을 오므리고 있네?"
라고 천진난만하게 잘난 체를 했더니,
우리 아드님 나를 식 흘겨 보며 하시는 말씀.
"엄마.. 원래 나팔꽃은 말이죠... 아침에 활짝 폈다가 오후엔 오므리는거예요. "
라며 나를 한심하게 쳐다본다. -_-;;;;;;
아 맞다.. 글치...

애들을 키우다 보니, 잊었던 일들이 어찌나 많이 생각나는지.
나도 어릴 때 저런걸 알고 있었는데,
봉숭아물도 들일 줄 알았고, 분꽃의 씨를 길게 빼서 옥상에서 낙하산이라고 날리기도 했었고, 그 분꽃의 까만 씨를 다시 화분에 심어주기도 했었는데..
이젠 그런걸 죄다 다 잊어버리다니.

새삼, 내가 바보 같은 어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와서는 바로 목욕탕으로 들어가서 혼자 발을 씻더니, 때가 꼬질꼬질한 욕조덮개를 매직블럭으로 열심히 30여분간 닦고 나온다 이 아들이.
어찌나 상냥한지..

요즘 한창 반항하느라 하루에도 열두번 야단 맞고, 지 방문도 쾅쾅 닫고 울고불고 하지만,
그래도 몽치와 함께 하는 시간은 참으로 귀하고 즐겁지 아니한가!

Posted by 몽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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